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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와 일상

문화대혁명과 홍위병, 이를 이용한 마오쩌둥의 권력탈환

◈ 대약진 운동의 실패에 따른 중국공산당 내부갈등

홍군을 이끌었던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의 승리를 거쳐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하며 권력의 정점에 오릅니다. 그 후 마오쩌둥의 주도 하에 1958~60년 사이에 노동력 집중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대약진 운동' 정책을 전개합니다. 기술발전보다는 노동 집중만으로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농촌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면서 농촌의 생산력이 급감하고 오히려 도시의 인구는 급격히 늘면서 생필품이 부족해지며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결국 수천만명의 아사자가 나올정도로 대실패를 합니다. 이 결과를 책임지면서 마오쩌둥은 국가 수석에서 물러나지요.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노선갈등이 심화됩니다. 즉,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선두로 한 실용주의자들은 기술발전과 공업 분야별 전문가를 우선할 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실용노선을 택한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한 수정주의자들과 마오쩌둥이 대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위협을 느낀 마오쩌둥은 공식적으로는 수정주의자들은 비판하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며, 내부적으로 '홍위병'조직하고 지원합니다.

 

 

◈ 마오쩌둥의 '홍위병'을 이용한 권력탈환

1966년 8월 8일, 마오쩌둥은 중앙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하면서 그 후 10년간 '문화대혁명'이 본격화됩니다.

문화대혁명의 목표는 수정주의자들을 숙청하고 4구(舊) 즉, 낡은 사상, 문화, 풍속, 관습 등을 타파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용당한 조직이 바로 '홍위병'입니다. 원래 대학에서 만들어진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지원 하에 전국적으로 조직되는데 이 때 대부분의 홍위병들의 나이는10대에서 20대 초반의 아직 가치판단 하기 어려운 어린 학생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학업에 치중해야 할 나이에 이들은 홍위병이라는 조직에서 단체활동을 하며 관제데모에 동원됩니다.

 

홍위병은 구시대적 문화유산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고대 사찰과 사당, 역사 유물들을 파괴했습니다. 게다가 지식인들을 수정주의자로 몰아 끌고나와 자아비판을 시키고 학살하기까지 합니다.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이었죠. 맹목적으로 마오쩌둥의 사상을 찬양하고 마오쩌둥을 신격화까지 하며 마오쩌둥의 권력재탈환에 힘을 보탭니다.

 

 

이런 과정을 알아보니 어디서 많이 본듯한 모습입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면서 학살을 자행한 사건들이 여럿 있었죠. '보도연맹'의 만행이라던지, 제주 '4.3사건', 곧 다가오는 광주 '5.18' 등 자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많이 닮아있습니다. 이런 비극은 안타깝게도 많은 나라에서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 이용당하고 버려진 홍위병세대

시간이 지나면서 마오쩌둥이 의도한 중국공산당 내부의 수정주의자들이 일부 숙청되거나 실각되었고, 어느 정도 목표달성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무렵 오히려 홍위병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지고 점차 분화되어 자신과 다른 혁명적 메시지를 전하는 타 조직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게 되고 마오쩌둥의 통제를 벗어나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이에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을 투입하여 홍위병의 폭력 사태를 저지하고 군대를 통한 통치를 시작합니다. 군대를 이용하여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홍위병을 '상산하향운동(젊은 학생들은 농촌에서 배워야한다)'이라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농촌으로 보내 와해시켜버립니다. 이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에 의해 이용만 당하고 농촌으로 돌아가고 낙후된 농촌의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민중으로서 삶은 피폐해졌죠.

 

1960년대 후반 당시 학생신분이었던 홍위병들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교육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켜 그후 10여년간 중국은 무학력자들의 시대를 지내게 됩니다. 그 결과 제대로 된 인문사회과학이 발전할 수도 없었으며, 그에 따른 창작물들도 생산되지 않았고 그 문화적 토대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중국의 근대화 전과 직후의 문화와 현대의 문화의 연결고리를 없애버린 것이지요.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어서 그 당시 홍위병이었던 지금은 60~70대의 나이가 된 세대와 현재 젊은 세대는 갈등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이 분석되지도 않았고, 반성할 기회도 없었으며, 그저 그 시대를 지나왔으니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문화대혁명'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도 못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원래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제대로 된 대가와 반성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이 잘못된 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계속 반복하게 되어 사회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권력을 지키기 위해 '홍위병'을 이용했던 마오쩌둥은 실각되지 않고 그저 나이가 들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등샤오평의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경제분야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되지만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중국은 과거의 잘못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결국은 시진핑의 개헌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마오쩌둥에게 이용당했던 어느 한편으로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홍위병'들은 지금 기성세대로서 젊은 세대에게 지금도 꼰대질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고 있는 아주 익숙한 장면이기도 합니다.